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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 안녕.
    드림/FF14 2025. 5. 25. 18:40

    *파이널 판타지 XIV '칠흑의 반역자' 확장팩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나바스아렝의 폐허가 가까워질수록 생각이 많아지는 것은 산크레드와 빛의 무녀뿐만이 아니었다. 레지나도 마찬가지였다. 폐허로 이끌리듯 다가갈수록 '민필리아'의 마지막이 다가오는 것을 느낀다. 아니, 자신이 아는 '인간' 민필리아는, '새벽'의 맹주는 승전 축하연 날 영원히 사라졌다. 작별의 말도 나누지 못한 채로.

    이제 마지막 인사를 할 시간이다.




    빛 속에서 두 사람을 기다리는 것은 역시나 그였다. 레지나가 산크레드의 기억에서 읽어낸 모습과 같았다. 실로 오래간만에 마주하는 얼굴에, 레지나의 표정이 잠시 평정을 잃었다. 애써 떨림을 억누른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산크레드의 부탁을 받았어. 이 아이를, 당신이 있는 곳까지 데려다 달라고."

    할 말을 마친 여자는 옆으로 한 걸음 빠져나와 상황을 관망했다. 이제 자신의 역할은 끝났다. 이것은 이름을 물려준 자와 이름을 받은 자 사이의 일. 처음부터 낄 수 없는 자리였고, 끼어들어서도 안 됐다.

    앞으로 나아가려면 선택할 수밖에 없어요…….
    우리는 갈림길에 다다르고 말았답니다.

    갈림길. 유독 선명하게 빛나는 그 단어가 여자의 귓가에 박혔다. 지금 갈림길에 선 것은 저 두 사람만이 아니리라. 그는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민필리아'와 빛의 무녀 중, 더 마음이 쓰이는 사람을 고르자면 단연 '민필리아'이다. 그러나 빛의 무녀 또한 무시할 수 없다. 환생체로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본래의 이름조차 잃은 채 세상을 위해 싸워야 하는 운명. '민필리아'를 살리는 것을 선택하면, 빛의 무녀는 자기 자신으로조차 살 수도 없게 된다. 비참하지 않을 수 없다.

    이건 그가 '민필리아'의 이름을 쓰는 빛의 무녀를 마음에 들지 않아 했던 것과는 별개의 일이다. 환생체이지만 전생체의 기억도, 지식도 없는 몸이다. 힘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세상을 위해 싸워야 하는가? 한 사람의 인생이 그렇게 태어나자마자 결정지어져도 되는가?

    이 모든 질문에 레지나는 항상 아니라고 답했다. 힘이 있다고 해서 세상을 위해 써야 할 의무는 없고, 자신의 운명은 남이 결정지어서는 안 되며, 오직 자신이 개척해야 한다고.
    그러나 '민필리아'를 되찾기 위해서는 그 답을, 자신이 살아온 인생을 정반대로 뒤집어야만 했다.

    하지만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 결정권은 이미 그의 손을 벗어난 지 오래였다. 레지나는 한참이나 침묵을 지키는 빛의 무녀를 초조하게 지켜봤다. 바싹 마른 입술에서 비릿한 향이 훅 올라왔다.

    위리앙제에게 감사 인사를 건넬 때까지만 해도, 결과는 얼추 예상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게 정말로 후회가 남지 않는 선택일까? 저 아이의 온전한 마음이 이끄는 길일까?

    일 분 남짓한 고요가 모두에게 억겁의 세월처럼 다가왔다. 마침내 고개를 든 빛의 무녀가 입을 열었다. 아, 레지나는 순간 정신이 아득해지는 것을 느꼈다. 한편으로는 짐작한 결과였다. 그래서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빛의 무녀는, 후대로 마음을 이어나가는 것을 선택했다. '민필리아'는 아직 답을 하지 않았지만, 지금까지 봐온 그라면 분명히 아이의 선택을 존중할 거라고 여자는 생각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 레지나는 왼손을 꽉 틀어쥐고 있었다.

    레지나는 모든 것을 자신의 손으로 해내야만 직성이 풀리는 류의 사람이다. 복수하는 것도, 살아남는 것도. 그래야만 자신이 살아있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새벽'의 일원이 되며 태어나 처음으로 동료가 생겼지만, 여전히 홀로 모든 일을 처리하는 것이 더 익숙하다.
    그렇기에 타인이 자신의 의지를 이어가는 것에도 별다른 감흥이 없다. 의지를 이었다고 해도 결국 나와 다른 타인이니까. 그 사람이 해냈다고 해서 내가 해낸 게 되지는 않으니까.

    그런데 지금 '민필리아'는 자신의 모든 것을 남에게 전하고자 한다. 삶을 포기하면서까지.
    이게 당신의 마지막이어도 되는 거야?
    비록 빛의 무녀가 그 마음을 이어받는다고 해도, 당신이라는 존재는 더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게 되는 거잖아. 그래도 괜찮아?

    정제되지 않은 것들을 마구 토해내고 싶은 충동이 그의 안에서 울컥 솟았다. 이게 마지막이라면, 만약 내가 당신이었다면. 내가 이 세상에 남길 말은 좀 더-

    멋진 꿈이네요……. 나에게도 한때 그런 소망이 있었죠.

    그 순간, 산크레드의 기억 속 장면이 파노라마처럼 떠올라 한데 겹쳐졌다.

    제1세계에서 희망의 등불이 꺼지지 않도록………… '빛의 가호'라는 힘의 존재를 끊임없이 증명하고 있을 뿐이에요.

    ……하지만 만약, 이 아이가 직접 운명을 받아들이는 길을 선택하고 험난한 세계를 헤쳐나가기 위한 힘을 원한다면……. 나는 모든 것을 이 아이에게 맡기겠어요.

    레지나는 마침내 깨달았다. 이건 그만의, '민필리아'만의 방식이구나.  이게 그가 삶을 살아가는 방식이구나.

    모든 힘을 넘겨준 '민필리아'의 형상이 서서히 흐려지기 시작한다. 두 사람에게 허락된 시간은 이번에도 길지 않다. 수많은 말을 가슴 속에 삼키고, '새벽'의 모험가는 한 마디만을 꺼낸다. 고르고 고른 가장 간결한 말을, 그러나 정말 묻고 싶었던 말을.

    "민필리아, …만족해?"

    부드럽게 미소짓던 얼굴이 레지나의 질문에 잠시 멈칫했지만, 이내 본래의 표정으로 돌아왔다. 그가 이제까지 봤던 것 중 제일 환한 웃음이었다. 대답은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세 사람을 둘러싼 빛이 점차 강해진다. 동시에, 한 사람이 이제 완전히 에테르계로 돌아가려 한다. 레지나의 본능이, 온 생애가 머릿속에서 외친다.

    때가 되었다.


    한 영혼이 마침내 저 너머의 세계로 향하네
    그 여정을 시작하는 이여, 두려워하지 말길
    그대를 기다리는 것은 영원한 안식이니
    더는 눈물 흘릴 필요도, 분노할 필요도 없으리라
    이 노래가 등불이 되어 그대의 앞길을 밝히고, 나아갈 길을 인도하리라


    노래에 화답하듯 조종弔鐘이 울린다. 잔잔하나 힘있는 종소리가 텅 빈 공간을 가득 채운다. 레지나의 시선은 마지막 순간까지 올곧은 그 눈동자에 머물렀다.






    다시 현실이다. 모든 것은 끝났다.

    맞은편에 쓰러져 있는 빛의 무녀를 부축하러 다가간 레지나는 멈칫했다. 더 이상 금빛이 아닌 머리칼. 한평생 빛의 무녀로 살아온 아이는 드디어 본래의 모습을 되찾았다.

    정말 끝이구나. 그는 탄식하듯 내뱉었다.

    '민필리아'로서의 증거마저 사라졌다고 걱정하는 빛의 무녀에게 레지나는 아무 말도 건네지 못했다. 자신도 답을 찾지 못한 문제였기 때문이다. '민필리아'는 정말 아무것도 남기지 않았나? '민필리아'가 이 세상에 남긴 것이, 존재했다는 증거가 단순히 신체적인 면 뿐일까?

    불안으로 떨리는 아이의 눈동자가 레지나에게 향했다. 더는 새파란 색으로 반짝이지 않는, 평범한 푸른 빛의 눈동자가. 그는 이 시선을 안다. 그러나 지금의 시선은 아이를 처음 마주했던 그때와는 다르다. 알 수 없는 무언가에 이끌리듯 그의 입이 움직인다.

    "…아니야. '민필리아'로서의 증거는 여전히 남아 있어. 네가 지금 이곳에 서있다는 것 자체가 그 증거야."

    내가 지금 무슨 말을 한 거지? 레지나는 할 수만 있다면 방금 뱉은 말을 주워 삼키고 싶었다. 나조차 확신할 수 없는 문제를 사실인 것마냥 단정짓듯 말하다니. 그러나 떨림이 잦아든 저 얼굴을 보자 차마 그럴 수 없었다.

    "그런……가요?"

    "그래, 그러니까 돌아가자."

    그는 처음으로 아이에게 먼저 손을 내밀었다.




    산크레드의 감정을 짐작하고 있는 사람 중 하나로서, 그가 어떻게 반응할지에 대해 걱정이 없었다면 거짓말이다. 단지 걱정보다 믿음이 더 강했을 뿐이다. 그가 나에게 한 말들, 란지트의 앞에서 보인 행동들. 그리고 그는 그 믿음을 저버리지 않았다.

    '새벽'의 다른 일원들 또한 아이의 겉모습이 바뀐 것에 놀람을 표현했을지언정 원망의 말을 쏟아내지는 않았다.

    자리에 모인 모두는 아이가 감정을 추스르기를 기다렸다. 울음이 잦아들자, 야슈톨라가 가장 먼저 앞으로 나아갔다. 은회색으로 반짝이는 눈동자는 언제나 한 걸음 앞서 미래를 바라봤다.

    "…특히…… 매듭을 짓기 위해 우리 에게 가장 필요한 일이에요. 우린 민필리아의 '새벽'에 모인 사람들이니까요."

    레지나는 몇 년 전의 일을 반추했다. 모래의 집에서 '새벽'의 맹주와 처음 얼굴을 마주했던 그때를. 그 간절함에 이끌렸던 그때를.

    아, 내가 들어오고자 했던 '민필리아'의 '새벽의 혈맹'은 이제 영원히 사라졌구나. 조직은 유지되겠지만, 앞으로 어떤 길로 나아가든 처음 들어왔을 때와 같은 조직은 아니겠구나.

    마녀의 말이 맞다. 어떤 일은 완벽히 매듭지어져야 한다. 그리고 그건 자신뿐만 아니라 이 아이에게도 필요하다.

    여전히 그는 '민필리아'가 왜 세상을 이토록 사랑하고, 자신의 손으로 모든 것을 끝맺지 않았는지 이해하지 못한다. 하지만 이것이 '민필리아'가 바라는 일이라면, 나는 이 아이가 걸어갈 길을 지켜보고, 그 소망이 어떻게 전해질지 지켜보겠다고. 그는 생각한다.

    레지나의 시선이 이제 막 태어난 빛으로 향한다.

    지나온 모든 것에 작별을, 새로운 모든 것에 인사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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