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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산] 꿈과 현실 사이드림/FF14 2025. 3. 28. 13:59
*파이널 판타지 XIV '홍련의 해방자' 확장팩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855.
탐드구몬. "네가 없는 꿈을 꿨어." "놀랐겠네. 일어날 시간이야."
-탐드구몬 백업봇
어딘지 모를 공간에서 목소리의 주인을 만난 후, 시야는 다시 암흑으로 물들었다.
그래, 쓰러지기 직전에 엘리디부스가 나를 향해 검을 휘두르고 있었지. 피할 방법이 없으니 치명상을 입었거나, 어쩌면 이미 죽었을지도. 그러면 여기는 사후세계인가? 아무리 그래도 너무 어두운데...
어둠에 적응하기 위해 눈을 두어 번 깜빡인 순간, 칠흑 같은 공간 대신 익숙한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돌의 집이었다.
나는 거세게 문을 열어젖혔다. 나무문이 벽과 부딪히며 부서질 듯한 굉음을 내자, 문 가까이 자리한 몇몇이 소음에 놀라 몸을 들썩였다. 나를 이상하다는 듯이 쳐다보는 이도 있었지만,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다.
기다란 바 테이블에 몸을 기댄 채 이야기를 나누던 어린 엘레젠이 소리에 놀라 뒤를 돌아본다. 붉은 머리끈으로 동여맨 머리카락이 그에 맞춰 휘날린다. 방문자의 정체를 확인한 그의 입가에 저절로 미소가 그려진다.
"뭐야, 당신이었어? 놀랐잖아. 말도 없이 어딜 갔다 오는 거야?"
알리제다. 언제나와 같은 얼굴을 한.
하지만 내게 걸어오는 자는 정말 '알리제'가 맞나? 아씨엔의 수작은 아닐까?
분명히 이것저것 따져야 할 것이 많은데, 몸은 날듯이 그의 앞으로 향했다. 아무 말도 없이 다가서자 알리제가 당황하며 한 발짝 뒤로 물러났다. 더 멀어지기 전에 어깨를 붙들고 몸 이곳저곳을 살폈으나 별다른 상처도, 이상한 곳도 없었다. 아, 다행이다. 나는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당신... 괜찮아? 안색이 안 좋은데."
알리제가 불안한 눈빛으로 내 얼굴을 빤히 쳐다봤다. 이 애가 염려할 만큼 내 표정이 이상했나. 거울을 보지 못해서 확인할 수는 없지만, 남이 걱정할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하지만 지금은 표정 따위에 연연할 시간이 없었다. 상황을 빨리 파악하는 게 먼저였다.
별일 아니야. 그나저나 다들 어디 있어? 산크레드랑, 위리앙제랑... 아무튼 다른 사람들 말이야.
대답을 기다리는 짧은 순간 가슴 속에서 불안함이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부디 입에서 나오는 말이 전부 혼수상태라는 말은 아니길.
그러나 알리제의 대답은 더없이 평범했다.
"알피노는 일이 생겨서 울다하에 갔고, 야슈톨라는 마토야 님에게 갔어. 위리앙제는 아마 늘 그랬던 것처럼 모래의 집에 있지 않을까? 산크레드는 잠깐 나갔는데... 아, 저기 온다."
마지막 말에 나는 반사적으로 몸을 돌렸다. 알리제의 말대로였다. 문을 등지고 걸어들어오는 남자는 확실히 산크레드였다. 하지만 알리제를 봤던 때와는 달리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한마디 말조차 나오지 않았다. 여느 때와 달리 멍하니 서있기만 하는 모습이 이상했는지 그가 천천히 내게로 걸어왔다.
"어이, 왜 그래?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그 말을 듣는 순간 맥이 탁 풀리며 헛웃음이 나왔다. 줄곧 딱딱하게 굳어있던 얼굴이 처음으로 누그러졌다. 그래, 그딴 게 현실일 리가 없지.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리자, 남자의 얼굴에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이 떠올랐다.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고 말하는 듯한 얼굴이었다. 이렇게 된 거 그냥 다 말하는 게 나으려나? 어차피 꿈일 뿐인데. 머릿속에서 결론을 내린 나는 천천히 이야기를 시작했다.
에오르제아 동맹군 회의에서 아씨엔 대책에 관해 논의할 때부터 이상한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했어. 정체를 알 수 없는 남자의 목소리였는데, 그 목소리가 들릴 때마다 우리 중에 누군가가... 쓰러지는 거야. 처음에는 너였고, 다음에는 위리앙제, 야슈톨라, 알피노... 알리제까지.
그 와중에 제국군이 에오르제아에 쳐들어왔고, 나는 제노스의 얼굴을 한 아씨엔과 싸우다 그 목소리를 듣고 정신을 잃었어. 조금 전에는 그 목소리의 주인과 만났고.
정말 이상하고 긴 꿈이지? 애초에 너희가 전부 쓰러진다니, 그럴 리가 없는데도.
긴 설명을 마칠 때까지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무리 황당하다고 해도 최소한 그렇구나. 정도는 해 줘야 하는 거 아냐? 사람 멋쩍게 만드네. 한 마디 쏘아붙이려 고개를 든 순간, 나는 그대로 숨을 멈추고 말았다.
산크레드는 완벽한 무표정으로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아무런 감정도 느끼지 못하는 인간은 저런 얼굴을 하겠구나. 싶을 정도였다.
처음 보는 표정에 겨우 풀어둔 얼굴이 다시 굳어진다. 저 아래에서부터 기이한 느낌이 몸을 타고 올라온다. 백 년이 넘는 세월 동안 기른 직감이 연신 적신호를 보낸다. 무작정 아무 말이나 던지기 위해 입을 열었으나, 그의 입술이 움직이는 속도가 더 빨랐다.
"놀랐겠네, 일어날 시간이야."
뭐?
기계음처럼 고저 없는 목소리가 귓가에 닿았다. 대체 무슨 소리인지 파악하기도 전에 나를 둘러싼 공간이 뒤틀렸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멀쩡하던 돌의 집은 울퉁불퉁한 곡선의 형태를 띠었다. 산크레드의 표정을 다시 확인하기 위해 고개를 돌린 바로 그 순간, 깨질 듯한 두통에 나는 머리를 부여잡았다. 이전과 같은 고통이었다. 다른 점이 있다면, 남자의 목소리가 온데간데없다는 것이었다. 그것을 제외하면 모든 것이 전과 동일했다. 쉴 새 없이 일렁이는 시야에 구토감이 치밀었다.
아픔을 꾹 참고 억지로 고개를 들어올린 내 눈에 들어온 것은, 산크레드가 힘없이 바닥으로 쓰러지는 모습이었다. 온통 흐릿한 시야에서 그 장면만이 선명했다. 다급히 뻗은 팔은 닿지 못하고 허공에서 멎었다.
안 돼, 대체 왜...
쿵 하는 소리를 내며 그의 몸이 바닥에 닿았다. 심장이 거세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이윽고 주변에서 고함과 웅성거림이 들려와 나는 반사적으로 귀를 틀어막았다. 부드러운 피부가 아닌, 단단한 뿔이 손바닥에 닿은 순간 나는 소스라치게 놀라 양손을 뗐다. 영원히 익숙해지지 않을 묘한 감촉에 소름이 끼쳤다.
눈까지 감아버리고 싶었지만 무슨 영문인지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마치 보이지 않는 손이 눈꺼풀을 억지로 잡아 벌리고 있는 듯했다. 정신을 잃은 남자의 모습만이 눈앞에서 어지럽게 흔들렸다.
영웅이니 해방자니 하며 칭송받지만, 이런 상황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역시 나는... 지독한 무력감이 족쇄처럼 팔다리를 옭아맨다.
...아니야, 정신 차려. 침착해야 해. 일단은 살아 있는지 확인하는 게 우선이야.
산크레드의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 몸을 숙인 바로 그때, 날카로운 비명이 귓가에 박혔다. 혼란과 고통 속에서도 선명하게 들리는 익숙한 목소리에 머리보다 몸이 먼저 반응했다. 멀쩡했을 터인 알리제가 바닥에 무릎을 꿇은 채로 신음하고 있었다. 부축하려 다가서던 내 발걸음보다, 알리제의 의식이 끊어지는 것이 더 빨랐다. 동시에 나 또한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어지럼증 때문이 아니라, 다리에 힘이 쭉 빠진 탓이었다.
이러면 안 돼, 앉아 있기만 한다고 달라지는 건 없어.
바닥을 짚고 일어서려다 무심코 아래로 시선을 돌린 나는 순간 멈칫했다. 공간의 상태가 심상치 않았다. 조금 전만 해도 곡선이었을지언정 형태는 유지했지만, 이제는 원형을 알아보기 힘들 정도였다. 흐릿한 시야 탓에 착각한 것이 아니라, 명확하게 공간 자체가 변화했다. 분명 회색 돌이었을 바닥은 어느새 검푸른 빛의 무언가가 되었고, 그것은 대여섯 개로 조각나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은 전혀 위화감을 못 느끼는 건가? 그러고 보니... 어느 순간부터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아.
뭔가 이상해. 나는 이를 악물고 몸을 일으켰다. 아마 가장 가까이에 있을 사람, 직전까지 알리제와 바에서 대화하던 에페미를 찾아봤지만 보이지 않았다. 안쪽으로 들어갔나? 연신 웅웅대는 머리를 한 손으로 짚고, 천천히 바 테이블을 지나쳤다. 그리고 내가 본 것은-
한 사람도 빠짐없이 쓰러진 '새벽'의 일원.
믿을 수 없는 광경에 나는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꿈에서 쓰러진 것은 오로지 '새벽'의 현인과 르베유르 남매뿐이지, 다른 사람들은 멀쩡했다. 그런데 지금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 나는 출입구를 향해 몸을 돌렸다. 문 근처에도 다른 일원이 있었다. 어쩌면 그들은 괜찮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곳의 상황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지금 '새벽' 사람 중에 멀쩡한 것은 나 혼자라는 사실을 깨닫자 저절로 실소가 나왔다. 몸이 미끄러지듯 바닥으로 추락했다. 차라리 나도 저들처럼 정신을 잃으면 좋으련만, 이 빌어먹을 몸은 쉽게 쓰러지지도 않는다.
시시각각 변하던 돌의 집은 이제 부서져 사라지기로 마음먹은 모양이었다. 공간이 가장자리부터 형태를 잃고 무너졌다. 그리고 그 자리를 암흑이 메웠다. 동시에 쓰러진 사람들 또한 하나둘 공허에 삼켜졌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전혀 없었다. 떠나가는 이들을 붙잡으려 했지만 아무리 팔을 휘저어도 손에 잡히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산크레드마저 어둠에 잡아먹히기 시작하자, 나는 실낱같은 희망을 붙들고 다시 한번 팔을 뻗었지만 바뀌는 것은 없었다. 그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지자, 세상도 기다렸다는 듯이 빛 한 점 없는 암흑으로 물들었다. 나약한 자신이 이렇게 원망스러운 적이 있었던가. 길을 잃은 참담함과 분노가 향할 곳은 오로지 하나뿐이었다.
눈을 감아버리기 전 나는 간절히 빌었다. 차라리 이 모든 것이 꿈이길. 그리고 그 바람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