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산] 발렌티온데이에는 마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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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엔딩 이전 언젠가.
레지나는 새빨간 하트가 가득한 그리다니아의 음악당을 곁눈질했다. 장식도 적당히 해야지. 여기저기 하트만 넘쳐나는 꼴이 그의 눈에는 꽤나 흉물스럽게 보였다. 의뢰인이 하필 음악당을 약속 장소로 정한 탓에 다른 곳으로 갈 수도 없었다. 하는 수 없이 그는 장식이 많은 쪽을 최대한 등지고 서 있는 편을 택했다.
의뢰인이 부탁한 일은 손쉽고 간단했다. 복잡한 설명이 필요하지도 않았다. 단지 조금 귀찮을 뿐이었다. 레지나가 그를 기다린 시간보다 의뢰에 관해 설명을 들은 시간이 더 짧을 정도였다. 예상보다 대화가 빨리 마무리되자 남자는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화제를 돌렸다.
그러고 보니, 모험가 님은 지금이 무슨 시기인지 아시나요? 저 장식들은 사실-
그런 건 딱히 궁금하지도 않았는데. 레지나는 적당히 한 귀로 남자의 말을 흘려들었다. 이 시간에 의뢰를 처리하러 가는 게 낫겠다고 생각할 즈음에야 의뢰인은 말을 끝맺었다.
...그래서 발렌티온데이 기간에는 소중한 사람에게 선물과 함께 마음을 전하곤 한답니다. 이야기를 들어주셔서 감사해요. 이건 제가 드리는 선물이에요. 그러면 의뢰, 잘 부탁드려요!
그는 얼떨결에 작은 하트 모양 초콜릿을 받아들었다. 선물 같은 건 필요 없다고 말하기도 전에 남자가 저 멀리 사라진 탓이었다.
의뢰를 무사히 끝낸 레지나가 모래의 집에 들어서자마자 본 것은 붉은 리본으로 장식된 하트 모양 상자였다. 여기도 하트야? 울다하에서까지 이어지는 하트의 향연에 그는 눈살을 찌푸렸다. 자세히 보니 상자는 하나만 있는 게 아니었다. 바닥에 아무렇게나 떨어진 상자들을 따라가니 그 끝에는 양팔 가득 선물을 끌어안은 산크레드가 있었다.
어, 레지나. 왔어? 여자들이 선물을 엄청나게 보내서 곤란하단 말이지... 너도 하나 가질래?
하여간 재수 없는 놈. 말은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안 그래도 연일 이어지는 의뢰를 처리하느라 피곤한데 저런 말에 소리내어 대꾸하는 건 에너지 낭비였다. 그는 대충 고개를 젓고 조금 떨어진 의자에 앉았다.
'새벽'의 일원이 된 이후, 레지나가 얻을 수 있는 정보의 양은 이전에 비해 확연히 많아졌다. 비밀결사이니 한계점이 존재하긴 했지만, 엄연한 단체인 만큼 혼자일 때와는 비교가 되지 않는 양이었다. 여러 사람이 정보의 진위를 판단할 수 있어 그 신빙성도 꽤나 높았다. 그리고 이런 정보 사이에서 그는 자신에게 필요한 의뢰를 골라냈다. 에오르제아의 상황을 파악할 수 있는 의뢰, 이계에 관한 실마리가 있는 의뢰...
그러고 보니 아씨엔도 있었지. 쌓인 의뢰를 정리하던 레지나의 손이 잠시 멈췄다. 정확히 어떤 놈들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이 행성과 깊게 연관되어 있는 건 확실해. 그쪽에 관한 조사는 산크레드가 한다고 했던가. 그의 시선이 건너편 책상에 걸터앉은 남자에게로 향했다. 남자는 선물 상자를 책상 가득 늘어놓고 하나씩 포장을 뜯는 중이었다. 이번 내용물은 마음에 들었는지 벌어진 입에서 작게 감탄사가 흘러나왔다. 그 꼴을 보던 레지나는 자신만 들을 수 있을 정도로 작게 한숨을 쉬었다. 마음에 들지 않는 인간이지만 이 세계에 관한 정보를 얻으려면 가까워져야 했다.
이리저리 널브러진 하트 모양 상자를 보던 레지나는 문득 주머니 속의 물건을 떠올렸다. 외투 오른편을 잠시 뒤적이던 그는 이내 하트 모양의 초콜릿을 꺼냈다. 그리고 한입에 쏙 들어갈 정도로 작은 그것을 괜히 엄지와 검지로 집어들었다.
...소중한 사람에게 선물과 함께 마음을 전하곤 한답니다.
레지나는 새까만 초콜릿에 새겨진 문양을 한 번, 아직도 상자를 열어보는 데 정신이 팔린 남자를 한 번 쳐다봤다. 이곳에는 구태여 선물을 줄 정도로 소중한 사람도, 전할 마음도 없다. 굳이 따지자면야 지금 제 앞에 있는 남자를 가장 오래 보기는 했으나 딱 거기까지였다. 그가 남자에게 가진 감정은 빈말로도 좋다고는 못 할 것들이었다. 당장 조금 전에도 저 경박한 남자에게 재수 없다는 말을 하려다가 도로 삼키지 않았는가. 물에 빠지면 주둥이만 둥둥 뜰 정도로 입만 살았으면서 괜한 자존심만 세우는 놈들은 그가 이전부터 질색하던 부류에 속했다.
애초에 첫 만남부터가 최악이었다. 교묘하게 정보를 숨기고 자신을 미행하는 남자를, 그는 암살자로 생각하고 죽이려 들었다. 간신히 오해는 풀었지만, 도저히 남자를 곱게 볼 수 없었다. 얼마 전에는 화염신을 홀로 상대하다가 죽을 고비를 넘기기도 했고. 분명히 같이 나간 임무였는데, 야만신이 소환될 때는 보이지도 않다가 처리를 끝낸 뒤에야 나타난 탓에 한바탕 화를 낸 기억이 레지나는 아직도 생생했다. 그 뒤에 사과를 받긴 했지만, 심지어 예상외로 꽤 정중한 사과였지만 여전히... 잠깐만, 그런데 나는 이걸 왜 생각하고 있지?
뭐야, 그거 선물 받은 거야? 안 먹을 거면 나 줘.
그 많은 상자를 언제 다 열어본 건지 산크레드는 어느새 그의 앞에 서서 천연덕스럽게 말을 걸었다. 레지나는 대꾸도 하지 않고 초콜릿의 포장을 뜯어 제 입안으로 쏙 집어넣었다. 디저트를 즐기는 스타일은 아니라 대충 아무한테나 주거나 버릴 심산이었는데, 남자의 말을 듣고 홧김에 저지른 짓이었다. 죽어도 저 자식한테 무언가를 주기는 싫었다. 더군다나 이런 걸 주자니 꼭...
야, 안 줄 거면 그냥 그렇다고 하지. 치사하게 바로 먹어버리는 게 어디 있어!
아, 시끄러워. 하여간 마음에 안 든다니까. 산크레드의 외침에 그는 몸을 휙 반대편으로 돌렸다. 작은 초콜릿은 천천히 입안에서 녹아내렸다. 색깔이 어두워서 쓸 거라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달았다. 어금니로 한 번 깨물자 작은 소리와 함께 부드러운 가나슈가 입 안에 퍼졌다. 기분 좋은 적당한 단맛이었다. 거슬리는 누구만 없으면 더 좋을 텐데. 다 녹은 초콜릿이 입에서 완벽히 사라짐과 동시에 레지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시 정보를 얻으러 갈 시간이었다.